한국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불륜 스캔들

한국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불륜 스캔들! 나혜석, 프랑스 파리 체류 중 최린과 불륜을 저지르다!

오늘은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그림을 찾아 그 미학을 좀 들여다 보면서, 그녀가 프랑스 파리 체류 시절에 벌어진 최린과의 불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 화가로만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당시 여성들에게는 상상조차 어려웠던 자유와 자기실현의 길을 걸었던 혁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혜석의 욕망과 신념, 그리고 사회적 통념이 충돌하며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죠.

파리에서의 불륜 스캔들은 나혜석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한국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불륜 스캔들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 1920 4월 10일 서울 정동교회

■ 나혜석, 시대를 뛰어넘은 여류화가

▶ 여류 예술가로서의 첫걸음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혜석의 부친은 사법관과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입니다.

 

나혜석은 1913년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한 후 부친과 오빠의 도움을 받아 일본 도쿄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 중에 시인이자 도쿄의 조선유학생 잡지 ‘학지광'(學之光) 편집에 참여한 최승구와 연인이 되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연애를 했으나 1916년에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자유연애는거기까지였습니다.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한 나혜석은 귀국하여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고, 1919년에는 3 · 1운동에 적극 가담한 일로 5개월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이후 나혜석은 친일 성향의 김우영과 결혼했고, 1921년의 첫 개인전 개최를 시작으로 각종 전람회에 출품하며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여성에게는 그림 그리는 일조차 사치처럼 여겨졌던 시대였지만, 그녀는 부유한 집안의 도움을 받아 활동을 하며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국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불륜 스캔들
수원 서호 풍경
한국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불륜 스캔들
농촌 풍경
한국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불륜 스캔들
수원 풍경

▶ 독창적인 작품 세계와 여성주의

 

나혜석의 그림은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당시 여성 화가로서 사회적 제약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선언한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나혜석은 그림뿐만 아니라 글을 통해서도 여성의 권리, 자유, 자아실현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는 이러한 그녀의 목소리를 참을 수 없는 도발로 여겼습니다.

1927년 유럽 여행길에 오르면서 남편 김우영과...
한국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불륜 스캔들
나혜석의 프랑스 파리 체류 시기의 사진

▶ 예술적 도약을 위한 유럽 여행

 

1927년, 나혜석은 남편인 김우영과 함께 유럽으로 떠납니다.

당시 그녀는 미술적 완성을 위해 유럽의 예술 중심지인 프랑스를 방문한 것이었죠.

 

파리는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르누아르, 고흐, 피카소와 같은 거장의 작품을 직접 접하며 창작에 대한 열정이 더욱 커졌습니다.

로제 비시에르(Roger Bissière)의 화실에서 그림 공부도 했습니다.

 

과연 파리라는 도시는 당시 여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상징처럼 느껴졌고, 이는 그녀에게도 강렬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불륜 스캔들
나혜석 김우영 부부 우측사진 최린

■ 나혜석에게 최린의 존재?

▶ 최린은 누구인가?

 

파리 체류 중, 나혜석은 독립운동가이자 지식인이었던 최린(1878년-1958년)과 가까워졌습니다.

최린은 유창한 말솜씨와 날카로운 지적 매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인물이었죠.

 

당시 나혜석은 결혼 생활의 답답함과 예술적 고민으로 힘들어하던 시기였기에, 최린과의 만남은 그녀에게 금단의 위로처럼 다가왔던 것입니다.

사실 최린은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이기도 합니다.

최린은 3.1 운동에 참여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친일 인사로 변절했습니다.

일본식 이름은 가야마 린(佳山 麟)이었습니다.

 

최린은 1918년부터 손병희와 오세창, 권동진 등 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독립 운동의 방안을 논의하다가 1919년 3·1 운동을 구상했습니다.

최린은 불교계의 한용운, 기독교계의 이승훈을 통해 두 종교 대표를 참가시키고 기미독립선언서 기초자로 최남선을 추천하는 등 기획 과정을 주도했으며, 또한 3·1 운동의 3원칙으로 대중화와 단일화, 비폭력을 제시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 이후 곧바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하였답니다.

한국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불륜 스캔들
1940년 2월 11일자 최린이 기고한 글

출옥한 후 1922년 1월부터 3월까지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무과, 교육과 주임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교단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최린은 폭 넓은 사회활동을 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1920년대 초 손병희가 죽고 난 이후 천도교는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되고, 이때부터 최린은 ‘민족개량주의’ 경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론’을 내세우며 신파를 주도했습니다.

이 자치론은 “독립의 전단계로서의 자치와 실력 양성”을 뜻하였고, 이는 곧 독립을 위한다는 명분과 실력 양성이라는 실리를 만족하므로 최린을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의 유산계층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러한 자치론은 친일 세력으로 전향시키려는 일제의 정치모략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자치운동 조직 연정회의 부활을 기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신간회의 구파와는 대립했으며, 총독부와 밀착한 이러한 행보는 변절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

▶ 사회적 통념의 금기를 넘다.

 

1928년 파리에 외교관으로 주재하고 있던 중 우연히 나혜석을 만나게 됩니다.

프랑스어를 몰랐던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식당, 극장, 뱃놀이, 시외 구경을 다녔습니다.

1928년 11월 20일 저녁, 두 사람은 오페라를 관람하고 함께 나혜석의 숙소인 셀렉트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최린은 자기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그런 관계가 수십 회 이어졌고, 파리 유학생 사회에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란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나혜석은 한국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최린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빠져버렸답니다.

나혜석은 기존의 도덕적 틀과 여성에게 강요된 희생적 사랑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를 솔직히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최린 역시 그녀의 강렬한 매력에 이끌렸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사회적 금기를 넘어선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억눌렸던 자유와 사랑을 찾고자 했던 두 사람의 치열한 몸부림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혜석이 여러 남성과 연애한다는 소문을 들은 남편 김우영은 베를린에서 비밀리에 파리로 가서 나혜석의 뒤를 따라갔고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나혜석의 폭로가 담긴 ‘우애결혼, 시험결혼’ ‘이혼 고백서’가 실렸다

결국 두 사람의 불륜이 밝혀지며,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은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불륜은 여성에게는 치명적인 낙인이었으며, 사회는 나혜석에게 가혹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나혜석은 최린과의 관계에 대해 솔직히 인정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이혼 후 그녀는 자녀의 양육권까지 박탈당하며 모든 것을 잃은 상태로 남겨졌습니다.

그러나 나혜석은 이혼한 뒤,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 유린죄라는 명목으로 법원에 고소하게 됩니다.

 

나혜석은 최린을 상대로 12,000원의 위자료 소송을 청구합니다.

최린은 이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매수하고, 그는 2천원의 돈을 나혜석에게 전달하고 입막음을 합니다.

 

그러나 타인의 아내를 유혹하고 가정을 파탄냈다는 사회의 조롱과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도 신뢰가 깎이게 됩니다.

나혜석이 그린 김우영초상화 1928

■ 나혜석, 사회적 낙인의 굴레 사회적 비난

▶ 삶의 나락과 예술가로서의 몸부림

 

이혼 이후, 나혜석은 더 이상 이전처럼 예술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그녀를 부도덕한 여성, 가정을 파탄 낸 사람으로 낙인찍었고, 그녀의 예술조차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점점 더 빈곤과 고립 속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자신의 목소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기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글에서 여성의 자유와 행복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그림에서는 여전히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펼쳐 보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목소리를 외면했고, 그녀의 작품은 점차 잊혀져 갔습니다.

강변풍경 1930년대 캔버스에 오일 23×32cm
선죽교 1933년 목판에 오일 23×33cm
별장 1935
파리풍경 1928
해인사 석탑,합판에유채,1938년무렵,개인소장
무희 1940
자신이 그린 그림 곁에 서 있는 나혜석.

■ 맺음말 : 비극적 최후와 남겨진 질문

▶ 나혜석, 그녀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 글을 정리하면서 드는 의문점 하나는 나혜석 본인도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면서… 결혼도 친일파 김우영과 하고, 불륜도 변절자 친일파 최린과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만… 여성 예술가, 지식인이 감당했어야 할 시대적 굴레일까요?>

 

나혜석은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한 여인숙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삶은 시대를 앞서갔던 만큼이나 고단했고, 그녀의 죽음은 그 누구에게도 크게 주목받지 못한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습니다.

 

나혜석이 남긴 예술적 사회적 유산은 오늘날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경기도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가 생겼고 그녀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혜석이 단순히 파격적인 삶을 산 예술가가 아니라,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던 선구자였다고 숭앙하고 있습니다.

나혜석의 그림과 글은 당시의 제약 속에서도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나혜석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였습니다.

사랑과 욕망, 신념과 도전, 그리고 실패와 비난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잃지 않으려 몸부림쳤습니다.

 

나혜석의 파리에서의 불륜 사건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억압과 금기를 거부하고자 한 그녀의 외침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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