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삶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여류화가, 멕시코의 열정적인 페미니스트 여류 화가 - 프리다 칼로 평전
멕시코 출신의 열정적인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7.6 ~ 1954.7.13.)
그녀는 독특한 예술 세계로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삶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불굴의 여류 화가입니다.
오늘은 프리다 칼로 작품의 미학,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의 변신, 그리고 그녀가 자화상에 집착했던 이유를 이곳저곳 자료를 찾아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처음서부터 힘들었던 프리다 칼로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을 들었다.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헝가리계 독일인인 아버지는 평범한 사진사였으며 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집안은 가난했으며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유모의 도움으로 자랐답니다.
1913년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쇠약해지는 장애가 생겼고, 이 때문에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러시아 혁명가에 심취하여 평생 공산주의 옹호론자가 되었답니다.
이때 학교의 벽면에 벽화를 그리던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를 만났습니다.
당시 리베라는 멕시코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유명한 예술가로 알려져 있었고 프리다 칼로는 그의 작품과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프리다 칼로는 리베라의 영향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답니다.

1925년 18세 때는 교통사고로 척추와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게 되고 이는 곧 프리다의 삶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그녀가 화가되었을 때 작품 세계의 주요 주제가 되었습니다.
1929년 연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와 21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하였습니다.
1930년 벽화제작을 의뢰받은 리베라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디트로이트에서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프리다는 리베라의 그늘에 가려 항상 외롭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1933년 록펠러재단의 의뢰를 받고 벽화를 제작하던 중 레닌의 얼굴을 그려넣을 것을 두고 재단측과 불화로 벽화제작이 취소되었고 마침내 고향 멕시코로 돌아왔습니다.
멕시코에 돌아온 후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리베라의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여자관계는 급기야 프리다 칼로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우게 되었답니다.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실망과 배신 그리고 분노와 함께 극심한 고통속의 나날을 보냈으며 프리다 칼로의 작품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1939년 피에르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으나 프리다 칼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습니다.
그해 유럽에서 멕시코로 돌아와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했습니다.
잠시 미국에 체류하면서 사진가 니콜라 머레이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그녀에게 리베라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사랑의 존재였습니다.
1940년 8월 프리다는 디에고와 다시 결혼을 하였는데 디에고에게 성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조건을 요구하여 합의하였습니다.


■ 고통을 넘은 예술, 프리다 칼로의 미학
▶ 육체적 고통을 품은 색채와 상징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면, 그녀가 겪은 육체적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녀는 18세 때 끔찍한 버스 사고로 척추와 골반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데요, 이는 평생 동안 그녀를 침대에 묶어두는 결과를 낳았죠.
하지만 그녀는 이 고통을 단순히 견디는 데 그치지 않고, 화폭 위에 풀어놓으며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주로 밝고 강렬한 색채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주제는 고통, 죽음, 재생 등 무겁고 심오한 주제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부러진 기둥(The Broken Column)」에서는 척추가 부러진 자신을 금속 기둥으로 표현하고, 몸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못은 그녀의 육체적 고통을 상징합니다.
이를 통해 그녀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죠.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점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선천적인 골반기형 때문이었고 이는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헨리포드 병원」 등과 같은 작품들로 형상화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의 모습은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부상당한 사슴」에서는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표현했습니다.


▶ 멕시코 민중 예술과의 결합
프리다의 작품은 멕시코 전통 예술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녀는 원주민 문화를 사랑했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녹여냈습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거나 멕시코 민속 신화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러한 점에서 그녀의 그림은 단순한 개인적 서사를 넘어 민족적 자긍심과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로도 기능했습니다.
그녀의 그림 속에서 등장하는 자연물과 동물들 또한 멕시코 고유의 토착적 상징성을 품고 있어 더욱 독특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우상, 프리다 칼로
▶ 왜 그녀는 페미니스트의 상징이 되었나?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간 여성입니다.
그녀는 남성 중심적 사회와 가부장적 관념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끊임없는 외도로 인해 겪었던 아픔과 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녀는 고통을 두려움 없이 마주하는 여성의 강인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가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인데요.
그녀의 그림은 여성의 몸, 정체성, 고통, 그리고 자아를 탐구하는 데 있어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은 당시 여성들에게 “스스로를 직시하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했죠.





▶ 프리다, 편견을 넘어선 자유의 아이콘
프리다는 성 정체성에 있어서도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양성애자였으며, 이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겨졌던 자기표현 방식을 주저 없이 선택하며 세상에 맞섰습니다.
그녀의 삶은 여성뿐 아니라 억압받는 모든 이들에게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그녀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 자화상, 그녀가 자신을 그린 이유
▶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프리다는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녀에게 그림은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고, 존재를 확인하는 도구였는데요, 자화상은 그녀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솔직한 예술적 표현 방식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병약함으로 친구가 없었고, 사고 이후에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자신의 모습과 끊임없이 대면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이는 스스로의 내면과 외면을 탐구하는 하나의 과정이었죠.



▶ 고통과 정체성을 기록하다
자화상은 단순히 그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녀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사건들을 기록했어요.
자신의 몸에 남겨진 고통의 흔적, 남편과의 관계에서 겪은 감정의 파고, 사회와의 갈등 등이 자화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죠.
예를 들어, 「두 명의 프리다」에서는 서로 다른 두 자아가 마주 보고 있는데, 이는 그녀가 느낀 내적 갈등과 이중성을 상징합니다.
프리다는 회저병으로 발가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고 골수이식 수술 중 세균에 감염되어 여러차례 재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극심한 고통속에서도 1953년 프리다 기념전이 열렸으며, 1954년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현한 마르크스와 스탈린을 추앙하는 정치색이 짙은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 여성으로서의 자아 탐구
그녀의 자화상은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과 여성성을 그림으로써, 여성의 경험이 단순히 아름다움에 국한되지 않음을 강조했어요.
이는 그녀가 자신의 결혼 생활, 유산, 그리고 사회적 고정관념에 대해 가진 복잡한 감정을 담아낸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 프리다 칼로, 그녀가 남긴 유산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세상에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 혁명적 예술가였고, 편견에 맞선 강인한 여성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녀의 그림은 그녀의 삶을 반영한 거울과 같으며, 이를 통해 그녀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깊은 영감을 줍니다.
1954년 7월 2일 디에고와 함께 미국의 간섭을 반대하는 과테말라 집회에도 참가하였다가 7월 13일 폐렴이 재발하여 사망하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마지막 일기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프리다는 또 이렇게 말했죠.
“나는 떠난 뒤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 말처럼 그녀의 작품과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 후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