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한국 최초 창작 무용의 선구자 최승희의 생애와 공연 활동 및 월북 후의 행적...

최승희는 한국 무용사에 찬란히 빛나는 별이자, 우리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린 예술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생애는 한국의 격동기와 맞물려 독창적인 창작 무용을 개척하고, 문화적 가치를 빛낸 동시에, 그 끝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삶의 서사시였습니다.

지금부터 최승희의 삶과 무대 위 발자취, 그리고 북한에서의 행적까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서울 출생의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 별처럼 빛난 소녀 시절

 

▶ 어린 시절과 춤과의 만남

최승희는 1911년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춤에 대한 그녀의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빛을 발했습니다.

태양처럼 뜨겁게 끓는 열정을 품고 춤을 추던 그녀는 그 모습 자체로 한 편의 그림 같았다고들 합니다.

 

당시 조선은 일제 강점기의 어둠 속에 있었지만, 최승희는 춤을 통해 희망의 빛을 찾으려 했습니다.

일본 유학을 통해 이시이 바쿠(石井漠)라는 현대 무용가를 만나면서 그녀의 춤 인생은 새 국면을 맞이합니다.

이시이 선생에게서 현대 무용을 배운 최승희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자신만의 무용 세계를 열게 되었죠.

고려인 화가 변월룡이 그린 최승희 1954 --최승희의 춤사위
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1939년 파리 Salle Pleyel 공연팜플렛 SAI SHOKI는 최승희의 일본 활동 이름임
1939년 프랑스 파리 공연 당시 보살춤을 추는 모습

■ 세계 무대를 누빈 한국의 예술가

 

▶ 독창적 창작 무용의 탄생

최승희의 춤은 단순히 아름다운 몸짓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춤에는 이야기가 있었고, 한국인의 영혼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복을 입고 추는 그녀의 무대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동양화 같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승무’, ‘살풀이’ 같은 작품들은 한국의 전통 춤사위를 기반으로 현대적 해석을 더해 탄생한 걸작이었죠.

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리릭 포엠 중 최승희
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최승희 예술무용공연 포스터 1940년대 - 조선일보 신문기사
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1939년 파리 Salle Pleyel 공연 당시 28세 최승희 일본 활동명 '사이 쇼키'

▶ 유럽과 미국에서의 성공

 

1930~40년대, 최승희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의 무대에까지 진출했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콕토,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로버트 테일러 등의 당대의 저명 인사들이 최승희의 공연을 관람 할 정도였답니다.

특히 로버트 테일러는 최승희와 굉장히 친밀했었고,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최승희를 소개해 주며 최승희의 헐리우드 영화 출연을 알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최승희의 헐리우드 진출은 무산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최승희는 ‘조선의 전설적인 무용가’로 불리며 세계 곳곳에서 찬사를 받았고, 각국 언론은 그녀를 두고 ‘살아있는 예술’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춤사위는 말 그대로 국경을 넘은 언어였고, 각국 관객들은 그녀의 무대에서 한국의 혼을 느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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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를 무용가의 길로 나서게 했던 이시이 바쿠와 그의 스튜디오
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여러 광고 잡지 화보 등 모델로 활동
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피카소 크림의 광고모델, 일본의 머릿기름 광고 모델, 잡지 모델 최승희
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의 변화

 

▶ 예술가의 양면성

일제강점기 동안 최승희는 일본 무대에서도 활동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 황실을 위한 공연을 하거나, 친일적 활동을 했다는 비판도 받게 됩니다.

그녀의 행보는 예술과 시대의 모순 속에서 갈등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광복 후 그녀는 이를 반성하며 새로운 도약을 꿈꿉니다.

최승희 평전, 한국최초 천재 무용가 자진월북예술인
최승희(앞줄 오른쪽)와 남편 안막 딸 안승자
월북 직후활동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무용가르치고 있는 모습
조선 아동 무용 기본 최승희 저 1963

■ 북한으로의 월북

 

▶ 월북의 이유

광복 직후 최승희에 대한 여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답니다.

최승희의 주변인이나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최승희 본인은 자신의 친일 행위를 나름 반성하긴 했지만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 남편 안막 역시 이북으로 자주 월북했었고 최승희에게 여기 있다가는 살기 힘들고 무용을 하는 것도 힘들다하면서 종용했다고 합니다.

 

1946년, 최승희는 북한으로 월북합니다.

이 선택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녀는 예술을 통해 민족을 하나로 묶고자 했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둘러싼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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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와 중공군 연예공작대원들
애국렬사릉의 최승희 무덤

■ 북한에서의 활동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환대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의 대접을 받습니다.

1947년 평양에서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조선무용을 비롯해 서양무용도 가르쳤습니다.

또한 평양 지역 대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면서 ‘조선민족무용’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최승희는 가족들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중국에서도 최승희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주은래로부터 지원을 받아 ‘최승희 무용 훈련반’을 설립하고 후진 양성과 중국 경극의 개혁에도 참여했습니다.

 

그 뒤 전쟁이 끝나 북한 김일성으로부터 조선무용가동맹 위원장으로 발탁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자리에 올랐습니다.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에 취임하였고 그 자신은 공훈배우, 인민배우 칭호도 받았습니다.

 

김일성은 최승희의 명성이 워낙 세계적이었고, 그 미모도 빼어났기 때문에 외국에서 국빈이 왔을 때 최승희가 와서 공연을 해주면 이를 무척 고맙게 생각했으며 또한 최승희의 해외 공연 활동이 신생 국가 북한의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김일성은 최승희에게 더욱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금세 친밀한 사이가 되었으나 최승희는 애초에 공산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더욱이 김일성의 우상화와는 더더욱 거리가 먼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사건건 마찰이 있었답니다.

 

1958년, 남편 안막이 부르주아 비평가로 몰려 몇 몇 문학가들과 함께 숙청되면서 최승희의 입지도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정치적 환경 속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었고, 결국 1960년대 말에는 그 자신마저도 숙청되어 무대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최승희의 정확한 사망 연도와 날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애국렬사릉의 최승희 무덤의 묘비를 보면 1969년 8월 8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시대의 굴곡 속에서 불행했던 춤꾼 최승희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의 미공개 사진
1937년 광주 공연 당시 숙명여고 동창들과 함께 찍은 사진
경성 조선 호텔 양식당에서 차를 마시는 최승희 1930년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을 만난 최승희, 경성의 명월관에서 열린 우승 축하 파티에 참석했다
1930년 3월 31일자 조선일보 신문기사 최승희 보도
외국인들이 1930년대 무용가 최승희의 무용발표회 포스터를 흥미있게 관람하고 있다

■ 불행한 춤꾼 최승희, 잊히지 않는 유산

 

최승희의 생애는 예술과 정치, 그리고 시대의 굴곡 속에서 빚어진 비극이었습니다.

그녀의 춤은 한국 무용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었지만, 그녀의 정치적 선택은 끝내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비록 그녀의 말년은 불행했지만, 최승희가 남긴 춤의 흔적은 여전히 무용계의 귀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한국의 전통을 세계에 알린 첫 무용가로서, 오늘날 많은 후배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최승희의 생애는 단순한 예술가의 삶을 넘어, 한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한 역사였습니다.

 

그녀의 춤은 하늘에 그려진 별의 궤적처럼 찬란했지만, 그 끝은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예술적 유산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최승희는 춤으로 역사를 쓴 예술가였습니다.

 

이제,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며 우리 전통 문화의 가치와 무용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최승희가 바라던 세상은 아마도 그러한 것이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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