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천재성을 끝내 밝혀준 제수씨 요한나

아무도 몰랐던 빈센트 반 고흐의 천재성을 끝내 밝혀준 여성, 빈센트 반 고흐의 제수씨 요한나 봉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라는 이름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당연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혹시 이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인 테오 반 고흐의 아내, 요한나 봉허(Johanna Gesina van Gogh-Bonger)입니다.

빈센트 고흐의 작품과 예술 세계는 살아생전 딱, 그림 한 장만 팔릴 정도로 오랫동안 외면 받고 있었고, 그리고 빈센트는 권총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 그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요한나 봉허의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그림을 감상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요한나 봉허는 단순한 예술 애호가가 아니라, 빈센트의 유산을 세상에 퍼뜨리고, 그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요한나 봉허가 어떻게 빈센트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는지, 그 여정의 시작과 끝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도 몰랐던 빈센트 반 고흐 천재성을 끝내 밝혀준 요한나
요한나의 두번째 남편 코헨 코스자크가 그린 요한나 초상

■ 요한나의 시작 : 평범한 삶에서 특별한 여정으로

요한나 봉허는 186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며 안정된 삶을 살았습니다.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교육을 받은 교양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1889년, 요한나 봉허는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인 테오 반 고흐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 결혼은 그녀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죠.

그 당시 테오는 파리에서 예술품 거래인으로 일하며, 자신의 형 빈센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천재적인 예술가였지만, 그의 삶은 늘 불안정했고, 작품 역시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테오의 믿음과 지원은 확고했기에, 요한나 봉허도 자연스럽게 그 형제와의 사이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요한나도 참 불편했을 것 같습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늘 월급만 타오면 즉시 형에게 적지 않은 금액을 보내주고 형에게서 오는 편지는 몇 번씩 읽어보고 또 열심히 답장을 보내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으니까요.

더구나 그 형의 그림은 전혀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고 3류 화가도 아니었으니 말이죠.

아무도 몰랐던 빈센트 반 고흐 천재성을 끝내 밝혀준 요한나

■ 형제의 죽음 뒤, 시아주버니의 천재성을 깨닫다.

1890년 고흐가 37세의 이른 나이에 그 자신이 좋아하던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불꽃처럼 짧았고, 그가 남긴 예술 작품들 또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끝나버렸죠.

 

요한나 봉허는 그때 테오와 함께 슬픔을 나누며 빈센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몇 달 후, 사랑하는 남편 테오 역시 지병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과로와 죄책감으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막 돌이 된 갓난아기를 둔, 나이 서른도 안 된 과부가 된 요한나 봉허, 막막한 상황이었을 텐데 그녀는 주저앉는 대신 고향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하숙을 치며 생계를 잇기 시작했습니다.

밝고 활기찬 성격의 여성이었다지만, 갓난아기를 데리고 그 많은 빈센트의 그림을 옮기는 이사도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요한나 봉허는 갑작스럽게 두 사람을 모두 잃는 충격적인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죠.

이때 그녀는 남편의 유품과 빈센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668통의 방대한 양의 편지들을 한데 모아서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서는 너무나 불행했던 빈센트의 천재성을 편지를 한 장 한 장 읽으면서 깨달았고 왜 그토록 남편이 형을 챙겼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아내로서의 슬픔을 넘어서, 시아주버니 빈센트와 테오가 남긴 예술적 유산을 어떻게 세상에 알릴 것인가에 대한 커다란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아무도 몰랐던 빈센트 반 고흐 천재성을 끝내 밝혀준 요한나

■ 빈센트의 유산을 지키다 : 헌신적인 노력의 시작

요한나는 젊은 시절 영어 선생님이자 번역가로 활동했던 실력을 발휘해 남편이 형과 나눈 프랑스어 편지를 네덜란드어와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빈센트의 예술은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

이는 그녀가 혼자가 된 후 가진 가장 강력한 소망이자 목표가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훗날 아들이 알 수 있도록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생전에 빈센트에게 우호적이었던 예술가들과도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답니다.

 

요한나 봉허는 빈센트의 작품도 한 점 한 점 의미 있게 정리하고, 그의 삶을 연구하며, 시아주버니 빈센트를 세상에 알릴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빈센트가 세상을 떠날 당시, 그의 그림들은 대중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나 봉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 하나를 키우면서 여자의 힘으로 벅찼을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1901년 화가인 코헨 고스자크(Johan Cohen Gosschalk)와 재혼을 했습니다.

코헨 고스자크도 그녀가 하는 일에 전적으로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빈센트의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하고, 그가 남긴 편지들을 정리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녀는 빈센트의 그림이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고통스러운 삶과 내면의 갈등을 담아낸 작품임을 알리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 결과, 점차 빈센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가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독창적인 화가로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몰랐던 빈센트 반 고흐 천재성을 끝내 밝혀준 요한나
아무도 몰랐던 빈센트 반 고흐 천재성을 끝내 밝혀준 요한나

■ 편지의 힘 : 빈센트의 내면을 알리다

요한나 봉허가 빈센트의 예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바로 그가 남긴 편지들을 정리하고 출판한 일이었습니다.

빈센트와 테오 형제는 생전에 668통이나 되는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이 편지들은 그들의 예술 세계와 삶의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요한나 봉허는 이 편지들이 빈센트의 예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했습니다.

 

1890년대 말부터 요한나 봉허는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편지들은 빈센트의 예술적 비전과 정신적 고통, 그리고 그의 삶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으니 이 편지들을 책으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빈센트의 예술과 내면세계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통해 요한나 봉허는 빈센트가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그의 시대를 앞서간 독창적이고 복잡한 예술가로서 다시 평가받을 수 있을 거라 굳게 굳게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몰랐던 빈센트 반 고흐 천재성을 끝내 밝혀준 요한나

■ 전시회와 예술계의 인정

요한나 봉허는 또한 빈센트의 작품을 여러 전시회에 출품하며 그의 예술을 적극적으로 홍보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예술계는 여전히 보수적이었고, 빈센트의 독특한 화풍과 강렬한 색채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나 봉허는 좌절하지 않고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에 빈센트의 작품을 전시할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1905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회는 빈센트의 예술 세계가 크게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전시회에서 요한나 봉허는 400여 점에 이르는 빈센트의 작품을 선보였고, 이는 곧바로 대중과 예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로도 그녀는 지속적으로 빈센트의 작품을 다양한 전시회에 출품하며 그의 예술이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당시 젊은 예술학도였던 몬드리안을 비롯해 여러 예술가들이 이 전시회를 보고 화려한 색채를 과감하게 쓰는 방향으로 화풍을 바꾸었고, 생전 단 한 점 팔렸던 500프랑짜리 그림은 전시 이듬해 무려 20배에 달하는 값으로 팔렸습니다.

영국 내셔널갤러리에서도 독일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사러 왔고, 베를린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의 전시회를 기획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유독 좋아한 독일계 예술품 컬렉터 크뢸러 뮐러(Kröller-Müller) 부부는 부르는 대로 값을 줄 테니 모든 작품을 넘기라는 제안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훗날 평생 모은 작품을 네덜란드에 기증하여 1938년 미술관을 설립하는 데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다수가 소장되어 그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몰랐던 빈센트 반 고흐 천재성을 끝내 밝혀준 요한나
빈센트 살아생전에 한 점 팔린 그림 '아를의 붉은 포도밭'

■ 요한나 봉허의 헌신, 그리고 빈센트의 오늘날의 위치

1915년 요한나는 미국 뉴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뉴욕에서도 빈센트 알리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전시회를 여러 차례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틈틈이 읽고 번역한 두 형제의 편지를 모아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편지의 출간으로 빈센트 반 고흐는 드디어 세상에 널리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제 빈센트는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요한나 봉허는 평생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헌신 덕분에 빈센트 반 고흐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요한나 봉허의 이러한 헌신과 열정 덕분입니다.

그녀는 단지 남편의 형을 기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빈센트의 작품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고통과 열정의 산물임을 세상에 알리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요한나 봉허의 노력 없이는 빈센트의 작품이 지금처럼 널리 사랑받고, 예술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몰랐던 빈센트 반 고흐 천재성을 끝내 밝혀준 요한나
빈센트 반 고흐 동생에게 보낸 편지

■ 맺 음 말

요한나 봉허는 단순히 예술가의 가족이 아니라, 예술가의 유산을 지키고 전파한 위대한 수호자였습니다.

그녀의 헌신과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요한나 봉허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 덕분에, 빈센트의 예술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세상에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예술의 전파가 아니라, 사랑과 헌신이 만들어낸 놀라운 기적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이토록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 배경에는, 그를 끝까지 지지했던 동생 테오가 있었고, 그의 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삶을 바친 한 여성의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요한나 봉허는 단지 빈센트의 작품을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를 이해하고, 그의 내면세계와 예술적 비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에서 세계의 모든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요한나 봉허에게 경의를 표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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