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꾼 피카소의 어린 연인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뮤즈였으며, 피카소의 예술 세계에서 불멸의 존재로 남았습니다.
◈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의 운명적 만남
1927년 어느 날,
파리의 한 거리에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마리 테레즈 (Marie-Thérèse)를 처음 마주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17살이었고, 피카소는 45살이었습니다.
그날,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를 처음 본 순간 “당신과 나는 앞으로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화가 피카소요”라는 말을 내뱉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피카소의 열정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죠.
나이 차이와 상관없이 그들의 만남은 예술과 사랑이 뒤섞이는 강렬한 출발이었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그저 수영, 트레킹 등으로 몸이 단련된 건강미 넘치는 천진하고 평범한 소녀였지만, 피카소는 그녀에게서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피카소에게 마리 테레즈는 마치 빛나는 별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녀의 순수한 외모, 부드러운 곡선, 그리고 조용하면서도 고요한 매력은 피카소의 작품 세계에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뮤즈 이상의 존재였죠.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창작 에너지에 불을 붙였고, 피카소는 그녀를 통해 사랑과 예술을 한데 엮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됩니다.

◈ 중년 화가의 끈질긴 프로포즈 – 큐비즘을 완성하기 위하여?
피카소의 청을 거절한 마리 테레즈가 돌아서 가자, 피카소는 허겁지겁 뒤따르며
“아가씨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요? 그래야만 저녁 식사 초대장을 보낼 수 있으니까요” 하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답니다.
마리 테레즈는 6달 동안 피카소의 프로포즈 거절했으나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여섯 달이나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피카소를 거절합니까?
당신은 나를 이해하시지요. 한 여자로서 피카소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피카소는 테레즈가 부모의 동의가 필요 없게 된 18세 생일날 그녀의 허락을 받아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마리 테레즈가 열여덟 생일을 맞는 6월 13일, 둘은 육체적인 결합을 했답니다.
마리 테레즈는 이 사건을 두고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르누아르가 말했듯, 피카소는 먼저 여자를 겁탈하고 그 다음에 그 여자를 그렸지요. 상대가 나든 다른 누구든,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요.”

◈ 사랑과 비밀 – 감춰진 관계의 속삭임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는 아파트 위층에 있는 피카소의 작업실에서 부인 올가의 눈을 피해 밀애를 즐겼습니다.
나중에 그의 아파트 근처 라보에시에 집을 마련하고 부인 “올가”가 친구를 통해 마리 테레즈가 임신한 것을 알 때까지 부인 몰래 마리 테레즈와 스릴있는 밀회를 즐겼다고 합니다.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로맨틱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복잡하고 비밀스러웠습니다.
피카소는 그 당시 이미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아내 올가 코클로바(Olga Khokhlova)는 피카소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며, 그들의 결혼 생활은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이었으나, 점점 균열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피카소는 총 8명의 여자를 거느렸습니다. 이 중 마리 테레즈는 4번째의 연인이었습니다.
마리 테레즈와 피카소의 관계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했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은밀했고, 피카소는 자신의 아내와 세간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를 감췄습니다.
그러나 비밀스럽고 금지된 사랑은 오히려 피카소에게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마리 테레즈와 함께 보낸 시간 동안 그녀를 모델로 삼아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피카소는 풍만한 몸매에 젊고 활발하고 개성적인 마리 테레즈를 만나자 폭발적인 사랑의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중년의 피카소는 성적 포만감에 잠든 어린 여성을 화려하고 관능적으로 표현하고, 큐비즘등 다양한 방식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시도했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의 감정을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형태로 표현하며, 마리 테레즈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녀는 피카소의 캔버스 위에서 사랑의 화신처럼 그려졌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미술사에서 영원히 남을 작품들로 기록되었습니다.

◈ 마리 테레즈, 피카소 작품의 중심에 서다
1) 사랑의 표현 – 곡선과 유연함 속에 담긴 열정
피카소가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한 작품들은 그녀의 부드럽고 유연한 곡선을 강조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마리 테레즈는 마치 물처럼 흐르는 형태로 묘사됩니다.
피카소는 그녀의 순수하고 젊은 아름다움을 추상적으로 표현했으며, 이는 그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1932년에 제작된 〈꿈(Le Rêve)〉입니다.
이 작품에서 마리 테레즈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피카소가 그녀에게 느낀 감정을 담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부드러운 색감과 그녀의 안락한 모습은 피카소가 그녀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녀의 몸은 마치 구름처럼 부드럽고, 곡선은 피카소가 마리 테레즈에게 느낀 감정의 흐름을 상징합니다.

또 다른 중요한 작품은 〈거울 앞의 소녀(Girl before a Mirror)〉입니다.
이 그림에서 마리 테레즈는 자신의 반영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반영된 모습은 그녀의 내면과 외면의 두 가지 모습을 상징합니다.
피카소는 여기서도 그녀의 젊음과 순수함, 그리고 성숙함을 동시에 담아냈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그의 작품에서 항상 아름다움과 복잡성을 함께 지니고 있었습니다.

2) 색과 형태 – 피카소의 새로운 스타일로 탄생한 마리 테레즈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스타일에도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그린 작품들은 이전의 피카소와는 다른, 훨씬 더 밝고 감각적인 색감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몸은 자주 곡선으로 왜곡되었으며, 피카소는 그녀의 몸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추상화를 시도했습니다.
피카소가 그녀를 모델로 그린 작품들에서 자주 사용한 색상은 황금빛 노란색, 핑크, 그리고 부드러운 파스텔 계열이었습니다.
이 색들은 모두 마리 테레즈의 밝고 순수한 성격을 상징합니다.
피카소는 그녀를 단순히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만 그린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과 영혼을 그리려 했습니다.
그 결과, 마리 테레즈는 그의 작품 속에서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비로운 존재로 표현되었습니다.

3) 두 사람의 이별 – 예술과 사랑의 끝자락
마리 테레즈는 1935년9월 5일 귀여운 여자 아이를 낳았습니다.
피카소는 이름을 “마리아 데 라 콘셉시오(Maria de la Concepcion)”이라 지었답니다.
콘셉시온은 피카소의 죽은 막내동생 이름이었죠.
딸을 낳은 바로 그 해 어머니가 된 테레즈를 피카소는 잔인하게 버리고 또 다른 여자 도라 마르(Dora Maar)를 사귀고 있었습니다.
테레즈의 아름다운 육체만으로는 바람기 많은 피카소를 잡아 둘 수는 없었습니다.
테레즈의 소녀 같은 끊임없는 순종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세련되지 못하고 무식하다는 이유로만 1937년 그녀를 버리고 맙니다.
‘도라 마르’(Dora Maar)라는 여성 예술가였습니다.
도라는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가 만나던 시기와 겹쳐 그의 삶에 큰 변화를 불러왔죠.
피카소는 도라 마르와의 관계에서도 강한 예술적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도라는 마리 테레즈와는 전혀 다른 성격과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도라는 지적이고 강렬한 성격으로, 피카소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로 인해 피카소는 점차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에게 여전히 중요한 존재였지만, 도라 마르와의 관계는 그에게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주었고, 이는 결국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피카소는 두 여성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었고, 마리 테레즈는 점점 피카소의 삶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4) 이별의 고통 – 사랑의 끝과 남겨진 상처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의 이별은 공식적인 사건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습니다.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에게 여전히 사랑을 느끼면서도, 도라 마르와의 강한 예술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삼각 관계는 결국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를 깊이 사랑했지만, 그의 변심과 멀어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녀는 피카소의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였지만, 피카소의 예술적 욕망과 새로운 뮤즈들의 등장은 그녀를 점점 고립시키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이별은 감정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피카소의 사랑을 받았던 순간들이 지나가고, 이제 그녀는 그의 그림 속에서만 남게 되었습니다.

◈ 사랑의 기억과 슬픔, 예술로 남은 사랑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와의 관계가 끝난 후에도 그를 잊지 못했습니다.
테레즈는 피카소와의 사랑에서 받은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갔으며,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피카소를 17살의 어린 나이로 개성이 형성되지 못했고 성숙할 기회를 뺏기고 상처만 남긴 채 그녀의 인생은 엉망진창으로 되고 맙니다.
1973년 피카소의 장례식에는 “쟈크린 로크”(피카소의 마지막 부인)의 반대로 참석하지 못하고 먼 곳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피카소가 죽은지 4년후 1977년10월 20일 딸에게 피카소의 뒤를 따라가서 그를 보살펴야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차고에 목매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의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닙니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뮤즈였으며, 피카소의 예술 세계에서 불멸의 존재로 남았습니다.
또한 그것은 예술과 사랑, 그리고 상처의 복잡한 얽힘이었습니다.
피카소는 그녀를 통해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 작품들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강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작품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으며, 그들의 사랑은 예술의 역사 속에서 계속 이야기되고 있습니다.